김영식의 고려사 이야기 -- 진도의 삼별초국의 함락 (12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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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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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1 08: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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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삼별초국의 함락 (1270-1)
때는 1270년(원종11) 8월, 원종은 몽고에 태자 왕심을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고, 삼별초의 난을 알리게 했다. 태자는 몽고에서 돌아온 2개월 만에 다시 몽고로 갔는데 태자는 이 때 최탄이 바치고 망명한 동녕부 60여 성을 고려에 돌려달라는 청원서도 가지고 갔다. 그러나 황제는 대답지 않았다.
한편 승화후 왕온을 국왕으로 삼고 강화도를 떠나 남쪽으로 가던 삼별초는 여러 섬을 떠돌다가 이 해 8월 진도에 도착했다. 이들에게 붙잡혀 간 사람들 중 1천여 명이 탈출해 도망해왔다. 진도로 들어간 삼별초는 궁궐과 각 관청을 짓고 남해안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했다. 또 전라도안찰사에게 황제의 명령이라 속이고 백성을 독촉해 곡식을 거둬들이고 각 섬으로 옮겨 살게 했다.
이 해 9월 김방경이 몽고원수 아해와 함께 군사 1천 명으로 진도를 쳤으나 패배하고 물러났다.
삼별초는 전세를 몰아 뭍의 여러 성을 치니 장흥, 나주, 전주를 비롯해서 수많은 고을이 무너졌다.
12월, 몽고에 간 태자 왕심이 몽고사신 불화不花 등의 호위를 받으며 고려에 돌아왔는데 다음과 같은 황제의 글이 있었다.
“너희가 남송과 일본과 교통하지 않는다했는데 동경행성에서 너희와 왕래하는 남송의 장삿배와 일본사람을 잡아서 보고했다. 경의 전의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전에 배를 만들고 군사를 징발하겠다 했는데 군함과 군량을 준비하고 내 명령을 기다리라!”
원종은 원외랑 박천주朴天澍에게 명령해 태자 왕심을 모시고 온 몽고사신과 함께 진도에 가서 삼별초에게 황제의 이 글을 보이게 했다.
사신이 진도에 가자, 삼별초왕 승화후 왕온이 사신을 맞아 진도 벽파정碧波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삼별초군은 몰래 배 20척을 보내 고려정부 배 1척을 빼앗고 90여 명을 죽였다.
삼별초왕 승화후 왕온은 글을 가져온 몽고사신을 억류하고 황제의 글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 글은 내게 온 것이 아니니 받을 수 없다!”
또 삼별초왕 승화후 왕온은 고려왕 원종이 보낸 국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주었다.
“명하는 대로 쫓겠습니다!”
때는 1270년(원종11) 12월, 김방경이 군사를 이끌고 진도에 도착했다. 삼별초는 모두 배를 타고 기치를 크게 벌려 징과 북소리로 바다를 들끓게 했다. 또 진도 성곽 위에서도 북을 치고 소리를 질러 기세를 돋웠다.
몽고장수 아해가 무서워 부하들에게 나주로 물러가 진을 치게 명령하니 김방경이 말했다.
“황제가 만약 이 일을 문책하신다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몽고장수 아해는 물러가지 못했지만 고려군은 참패하고 김방경과 고려군사들은 죽음직전에서 살아났다.
몽고황제는 이 날 아해의 싸우지 않은 죄를 물어 본국으로 송환하고, 후임에 흔도忻都와 사추史樞를 파견했다.
때는 1271년(원종12) 1월, 고려는 추밀원사 김연을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 고려 태자 왕심과 몽고황제 딸 공주와의 결혼을 정식으로 청혼하고, 지난번 고려가 남송과 일본에 교류한다고 트집 잡았던 황제의 글을 변명했다. 그런데 이 사신이 개성을 떠난 며칠 뒤인 2월 황제는 비서감秘書監 조양필趙良弼을 보내 말했다.
“조양필을 국신사國信使로 일본에 가게 하라. 홀림치忽林赤 왕국창王國昌 홍다구洪茶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사신을 해상에까지 호송케 하고 일본에서 돌아 올 때까지 김해 금주에서 기다리게 하라!”
또 며칠 뒤인 이 해 3월, 황제는 또다시 사신을 고려에 보내 일본정벌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짐이 여러 차례 일본에 사신을 보냈으나 듣지 않아 정벌을 명령한다. 군사를 일으키고, 군량미는 둔전을 통해 조달하라!”
몽고는 흔도忻都와 사추史樞 등을 일본경략사日本經略使로 파견해 황해도 봉주鳳州(봉산)에 군량미를 경작할 둔전을 두고 경작케 했다. 이 둔전에서 농업용으로 사용할 소 9천 마리 중 6천 마리는 만주 동경에서 가져 오는 비단 1만2천3백50필을 팔아 조달하고, 소 3천 마리와 농기구, 종자 그리고 말에게 먹일 풀 등 기타 모든 것은 고려정부가 조달케 했다.
고려는 농무별감農務別監을 각 도로 나눠 보내 황해도 봉주의 몽고병 둔전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케 했다.
한편 진도의 삼별초는 날이 갈수록 기세가 더해 갔다. 그들은 전라도지방 뿐 아니라 충청도와 경상도지방에까지 세력을 넓혀서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등 남해안의 크고 작은 유인도 30여 개와 수천여 개의 무인도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으로 기틀을 다져나갔다.
일본경략사를 겸임하고 있는 흔도忻都와 사추史樞는 진도의 삼별초가 진압되지 않아 일본정벌이 어렵게 되자, 몽고황제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고려에 장마철이 오기 전에 진도 삼별초를 평정해야 하오니 군사를 청합니다.”
몽고황제는 몽고에 볼모로 잡혀 있는 영녕공永寧公 왕준의 아들 왕희옹王熙擁에게 군사 400명과 군함 140여 척을 보냈다. 나머지 군사 6천여 명은 고려정부가 모집, 몽고군과 고려정부군이 합세해 진도를 정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 6천여 명과 황해도 봉주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파견 주둔 말 1만8천 필이 진도정벌에 동원됐다.
고려정부는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관군에 충당할 군사들을 모집했다.
때는 1271년(원종12) 여름 5월, 마침내 몽고황제의 명령을 받은 몽고군과 고려정부군이 3군으로 나눠 군함 1백여 척을 타고 진도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앞서 고려-몽고연합군이 삼별초에게 자주 패하자, 삼별초는 연합군에 대한 방비를 소홀이 했다. 이를 이용, 연합군이 갑자기 삼별초를 치기 시작했다.
김방경이 흔도와 함께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碧波亭으로 들어가고, 영녕공 왕준의 아들 왕희웅과 동경총관 홍다구가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진도 노루목(獐項)으로 들어갔다. 또 대장군 김석金錫, 만호 고을마高乙麽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들어갔다.
진도 삼별초는 벽파정으로 들어오는 김방경의 중군을 막으려 했다. 이 때 홍다구의 좌군이 불을 놓아 옆을 치자, 삼별초는 대장군 김석이 거느린 우군으로 달려갔다. 우군이 피해 중군으로 도망가려 하자, 삼별초는 연합군의 배 두 척을 붙잡아 병사 모두를 죽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전세는 삼별초에게 불리했다. 삼별초는 처자들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강화도에서 삼별초에게 붙잡혀 갔던 양반가의 딸들과 젊은 부인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약탈해 온 금은보화와 진도백성들이 몽고군의 전리품이 됐다.
삼별초 국왕 영녕공 왕준의 친형 승화후 왕온과 그의 아들 태자 왕환王桓도 붙잡혔다.
올 3월 영녕공 왕준의 아들 왕희옹이 몽고황제의 명령으로 고려에 오게 되자, 영녕공 왕준이 그 아들 왕희옹에게 말했다.
“아들아, 삼별초군을 진압케 되면 반드시 내 형의 목숨을 먼저 구해야 한다!”
왕희웅과 동경총관 홍다구가 거느린 좌군이 먼저 들어가 삼별초국왕과 그 태자를 붙잡았다.
좌군대장 왕희웅은 삼별초국왕 큰아버지와 그 태자 사촌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갔다. 먼저 달려간 동료장수 동경총관 홍다구가 그 부자의 목을 벤 뒤였다. 왕희웅은 피묻은 두 사람의 목을 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몽고황제의 명령으로 고려에 오게 된 것도 알고 보면 모두 큰아버지와 사촌형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삼별초국의 왕과 태자가 붙잡혀 죽게 되자, 삼별초 장수 김통정金通精은 나머지 무리들을 거느리고 제주도 탐라로 도망했다.
삼별초는 진도에 들어와 궁궐을 짓기 시작한 지 9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지금도 진도에는 이 때 지은 삼별초국의 궁궐터 등이 남아 있다.
한편 몽고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양반가의 딸들과 젊고, 아름다운 부인들은 원종의 요청에도 석방되지 못하고 모두 몽고로 붙잡혀가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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