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어느 인물에게도 호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주동 인물이 되었든 반동 인물이 되었든 누구 한 사람 정도는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페이지를 따르는 시선의 여행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법인데,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굳이 말한다면 삼왕자의 호위기사인 라에르 정도? 하지만 본디 무골(武骨) 스타일의 인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그의 신중함과 삼왕자와의 진심 어린 따뜻한 관계가 부럽기는 했어도, 내 마음을 얹을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판타지'라는 장르 아래 묶여있는 이 책이 이토록 내게 쌀쌀맞다는 것은 그 속한 범주에 걸맞지 않게 이 책이 '리얼'하다는 증좌일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사는 이 현실 속에는 내 맘에 드는 사람이 간간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 책은 현실적이라도 너무 현실적이다. 내 과거의 한때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맘에 차지 않는 인물의 맨 앞줄에 이 책의 주인공인 카르노 왕국의 삼왕자, 카스트로 폰 카르노가 있다. 위의 두 형이 적국에 볼모로 잡혀가고, 나라는 휴전 교섭 중의 갑작스런 패전과 강화이래 나날이 기울어만 가는 나라의 셋째 왕자. 언뜻 생각하면 조선시대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뒤의 효종(孝宗))이 생각난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의 생각과 행동은 효종을 생각케하는 바가 많다. 단순히 효종과 대비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카스트로를 통해서 효종의 심리를 상상할 수도 있었다. 효종의 강한 반청 정책과 대비되는 북학(北學)의 의지를 강력히 표현하였던 소현세자에 대해서 과연 효종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마도 카스트로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모국을 고통 속에 빠뜨린 적국을 상대로 한 반성과 평화를 주장하는 왕세자 아베르노에 대한 반감과 배신감 그리고 분노. 여기서 이 소설 속의 어느 인물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줄 수 없는 연유가 두드러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패배의 원인을 모조리 적국의 비겁함의 탓으로만 돌리며,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카스트로의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볼모 생활 4년 반만에 적국이 믿는 신(神)의 오롯한 신도가 되어 오로지 그들을 본받을 것만을 주장하는 아베르노의 자리도 아니다. 나 역시 이 책이 그 제목과 구성을 빌려온 마키아벨리와 비슷하게, '정치에 종교가 끼면 될 일도 안 된다'도 생각한다. 물론 국민들의 통합을 위한 구심점과 그들을 위한 도덕률로써의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 국가가 나아가는 진로의 키를 사제(司祭)들이 쥐고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 가고 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 책 속의 두 형제 중 어느 누구보다도 인조의 두 아들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사람 모두가 당시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의 폐쇄성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마음은 카스트로보다는 아베르노에 더 가까울 수도 있었으나, 결국 내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구에게도 맘을 붙이지 못한 채 불편한 채로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베르노를 사로잡고 있는, 적국인 테라의 신 케테르를 향한 열띤 감정 탓이었다. 비록 그가 추구하고 있는 개방과 타협 위주의 정치가 이미 기울어버린 카르노를 안정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언젠가 다시금 부흥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가 견제와 협력이 병행되어야 하는 타국인 테라에 대해서 그토록 균형을 잃고 기울어버렸다면 그것은 정도를 지나친 것이다. 종교에 대한 입장만으로 본다면 오히려 카스트로 쪽이 더 낫다고도 말할 수 있을 성싶었다. 비록 과격하고 열렬하기는 카스트로의 전신(戰神) 로마에 대한 숭배도 아베르노 못잖았지만, 적어도 로마는 카르노를 위한 신이기에 그에 대한 숭배의 열기는 결과적으로 카르노의 부흥만을 위해서 오롯이 바쳐질 수 있다. 또한 이미 카스트로는 로마의 영광을 위한 카르노의 부흥이 아니라, 카르노의 부흥을 위한 로마에의 신앙으로 마음을 잡고 있음을 읽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케테르의 영광을 위한 카르노의 부흥을 부르짖는 듯한 아베르노와는 이미 주어와 목적어를 반대로 잡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미 말했듯이 카스트로에게도 신뢰를 줄 수 없었다. 패배의 이유를 오직 타국에게만 돌리고, 오직 무력에 의한 복수만을 부르짖는 그의 분노는 나에게 와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래, 칼을 쓰는 것을 즐기지 않을뿐더러, 더군다나 이 경우에는 패배한 자의 성마른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강화조약 중의 수도에 대한 기습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일이나, 그렇다고 자국을 제외한 세 나라가 연합할 가능성을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카르노의 안일함은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왜 카르노는 다른 나라들과 손을 잡지 못했는가? 외교의 실패가 아니었을까? 물론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진정으로 카르노를 부흥시키는 과정에 있어서는 카스트로의 노선이 아베르노의 노선을 본받을 필요가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사보이 왕가의 중흥주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그 어떤 신하는 물론 어머니와 아내에게도 자신의 뜻을 밝히지 않는 신중한 처신을 통해서 프랑스의 속국 처지에서 기어이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의 몰락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계획을 두 번째 부인과 상의한 탓이었다. 입만 벌리고 눈만 뜨면, 승전국들에 대한 분노와 승리에의 다짐, 화친 정책을 추진하는 형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토로로 날을 새는 카스트로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신중함이었다. 그 젊은 혈기를 이야기하려든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대게 그 나이의 아이들은 이렇게 권력을 탐하지도 않는다고. 내가 카스트로에게서 느낀 불쾌감은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권력을 쟁취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소하려는 주제에 결국은 실패까지 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불길함에서 기인했다.
그러고 보면 카스트로는 콤플렉스의 인간이다. 사실 내가 그를 싫어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형에 대한, 테라에 대한, 레이얄에 대한 그의 콤플렉스는 나로 하여금 도저히 그에게 마음을 의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일거에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목걸이 사건의 주인공 잔느 바로아 드 라모트를 싫어했듯이, 자신의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무작정 갈구하는 인간들을 난 좋아하지 않는다.(그러한 어린애같은 생떼와 진정한 인간의 의지력을 구분하는 개인적인 기준이 엄밀하지는 않지만, 있기는 하다.) 결국 카르노의 부흥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카스트로 준 유트 폰 카르노, 그의 자격지심을 해소하기 위한 목표에 다름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지고 살 수 없다는 그의 의지는 결국 항상 트집거리를 찾아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형을 몰아낼,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삼기 위해서. 결국 그는 왕세자가 어떤 노선을 취하든, 자신의 조국이 어떠한 위치에 처했든, 결국은 그렇듯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칼날을 벼렸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나은 방책을 제시하려 노력했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권력의 쟁취를 위한 동기의 부여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내 생각에 가까운 왕세자 아베르노의 미숙함이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다. 이왕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가 한낱 삼왕자인 동생에게 허술한 구석을 보이면서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모습이 왠지 못마땅하게만 여겨졌다. 자신이 칼의 자루를 잡았는지, 날을 잡았는지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권력의 첩경이지만, 아베르노는 유감스럽게도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마치 동생이 칼자루를 쥔 것 마냥. 그는 그저 몇마디 큰 소리만으로 자신의 권력을 동생에게 발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실제 동생에 대한 정과 권력에 대한 집착 사이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는 좀더 강하게 동생의 의지를 억눌러야 했다. 권력보다 목숨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게 아니면 동생의 뜻에 따르는 시늉을 해서 그를 회유라도 해야했다. 육친의 정으로써.
적어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말한 권력의 쟁취와 유지는 미시적으로는 르네상스기 혼란했던 이탈리아의 통일과 안정을 위한 것이었고, 거시적으로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그 국민과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카스트로처럼 자신의 결핍된 부분을 어떻게든지 채우기 위한 화수분의 용도가 아니었다.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국가와 사회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거대한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때로는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배경에 결국 한 개인의 기갈을 채우기 위한 멈출지 모르는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혐오해야 마땅한 음험한 수작일 뿐이다. 모두를 위한다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단 한 사람을 웃음 짓게 하는 음모는 경멸할 수밖에 없다. 과연 이제 와서 급히 서둘러 힘을 길러서 테라를 치고, 레이얄에게 승리하며, 떨어져나간 미노를 재병합한다고 한들, 과연 누가 유쾌하겠는가? 패배한 국가로써의 배상금이든, 국가의 승리를 위한 전비(戰費)든, 결국 백성들에게는 똑같은 세금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영광을 위한다한들, 당장의 희생은 어찌해야 좋다는 말인가. 더구나 그 성질 급한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왕실의 정통성마저 뒤흔들어야 한다면? 더더욱이나 문제는 심각하다. 결국 그 모든 희생과 과실의 수혜자가 너무 분명해져 버리니까? 그 모든 강력한 선언과 달콤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패배이후, 축첩질로 날을 지새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달라며, 술집에서 억지를 부리는 카스트로를 보며 느꼈던 분노는 단순히 그 억지스럽기 그지없는 주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두려운 것은 저렇게 서슴없이 생떼를 쓰는 저 사람이 권좌에 올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합당한 명분을 얻게 되었을 때는 얼마나 더 국민들의 복종과 이해를 강요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피와 땀은 오직 카르노의 왕자로써 불시에 당한 기습으로 인해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강화 조약을 맺고, 셀 수 없는 수모를 당했던 카스트로의 한풀이를 위해서 제일 먼저 바쳐질 것이었다. 그는 그 승리와 부흥의 영광스러움을 국민들도 원하며, 또 함께 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겠지만, 대다수 민중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안목이 길지 못하다. 그들의 첫 번째 우선 순위는 그들 식탁 위의 부드러운 빵이다.
평소 즐기지 않는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고 말하기도 무색하게 이 책은 제법 현실적이다. 무엇보다 1권 내내 요정이나, 악마 같은 판타지 특유의 종족들도 마법의 구현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이 책의 고유한 종족으로써 등장하는 한족들의 신비한 능력만이 이 책의 판타지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륙과 왕실을 배경으로 삼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판타지 소설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판타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어도, 작가의 서늘한 문체는 이 책에 그 장르답지 않은 현실감을 부여하는 데 일조한다. 적절한 호흡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왕실의 사건들은 오히려 현실 속 정치 세계의 그것만큼이나 어둡고 복잡하다. 화려한 궁정에서 빛나는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고는 해도, 오직 그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고민하고 분노하며 계획을 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인간 군상들은 바로 이 세상의 존재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들은 절대 그들 서로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신뢰는 바로 권력의 분배를 의미하기에. 읽는 나조차도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서 읽기가 불편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내가 사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기에 그 재미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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