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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아방궁이었던 운덕영의 별장 즉 조선만자회(일명 松石園)에서 소장했던 김학순의 간찰입니다.
이 아방궁에서 이 간찰을 표구해서 걸었던가 봅니다.
표구했다가 뜯어낸 흔적이 있습니다.
조선 아방궁은 정조대왕이 신하들과 시담을 하던 공원인데 민영환의 동생 민영준이 프랑스 파리 초대공사로 갔다가
프랑스 별장의 건축설계도를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이 사이에 끼니가 간 곳 없던 윤덕영이 나라를 팔고 일본으로부터 30만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을 받게 됩니다.
이 금액은 일반 친일파들이 받은 금액의 10배가 되는 돈인데 윤덕영은 민영준이 가져온 별장 설계도를 입수해
옥인동에 장장 15년 동안 우리가 역사에 송석원 또는 조선만자회로 부르는 건축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이 건물이 완성되자 조선의 제일의 식자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하고 조선의 예술-문화작품들이 이 건축물에
걸리게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대다수의 조선 근대 예술품들이 이 건물에 소장되거나 소장고에 소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어필과 중국 황실의 황제의 글 그리고 중국과 일본 등 세계적인 명작가들의 작품들이 수집돼 걸리거나 소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터넷규장각의 자료에 따르면 이 곳에는 암행어사 박문수 간찰 등 수많은 조선의 유명인들의 간찰들도 소장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안동김씨 공조판서 형조판서 화서 김학순 [ 金學淳 ] 간찰
요약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벼슬길에 오른 후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여 공조판서·형조판서에 올랐다. 40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근면하고 청렴하여 청백리로서 이름이 높았다.
자는 이습(而習)이고, 호는 화서(華棲)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목사 김이석(金履錫)의 아들이다. 1798년(정조 22)에 사마시에 입격하고, 1805년(순조 5)에는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808년에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지냈고, 이듬해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814년 경상도 암행어사가 되어 각 지방관의 부당한 과세 징수를 바로잡았고, 1818년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823년 이조참의에 올랐다.
1825년에 충청도(忠淸道;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에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하는 틈을 타서 이창곤(李昌坤) 등이 청주성 북성문(北城門)에 조정을 비방하며 백성을 선동하는 괘서(掛書)를 써 붙인 '괘서사건'을 탐지하고 그들을 체포하였으나, 역모와 관련된 중대한 사건이라 그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다.
그 후 1829년에 다시 사간원대사간에 기용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1830년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올랐다. 1832년에 정경(正卿)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형조판서·예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저서에《화서집(華棲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