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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HOME > 한적 양장본 고문서 > 한적(漢籍) > 극희귀본(고활자본)

 ▒ 경매물품 : (한적) 사육신 박팽년 성삼 선생 문집 : 사육신선생문집 -- 朴先生遺稿 成先生遺稿 (전2권 1책 완질) 단행본 (1918년 목판본)
 ▒ 경매번호 : 52578   ▒ 출고번호 : 한희398

 경매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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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2 04:30:00 시 

 경매종료시간

 2018-10-25 04:30:00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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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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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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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품 상세 정보

 









 

* 물품 설명

이 땅의 만고충신의 징표인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선생의 유고입니다.

1918년 발행된 목판본입니다.

전 2권 1책 완질입니다.

제1권에는 박팽년 선생의 유고가, 제2권에는 성삼문 선생의 유고가 실렸습니다.

2권이 합권돼 실린 것입니다.

목판 상태가 고르지 못합니다만

이 사육신 문집은 한국 한적시장 또는 문화재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어

구하기가 힘든 책입니다.

정말 어렵게 어렵게 구해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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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팽년

[朴彭年]




박팽년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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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 필적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글씨는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유고입니다.

1818년 전2권 1책 단행본으로 발행된 책입니다.

판은 목판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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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자 인수, 仁叟, 호 취금헌, 醉琴軒, 시호 충정, 忠正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417년 ~ 1456년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천(順天)


관련사건
단종복위운동


대표관직(경력)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정의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박원상(朴元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고, 아버지는 박중림(朴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케 하던 휴가 제도)를 하였다.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이름높은 선비들이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그는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慶會樓)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成三問)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했으며, 이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兪應孚)·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유응부·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박대년(朴大年)과 아들 박헌(朴憲)·박순(朴珣)·박분(朴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 복위 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글만 표석(表石)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그의 절의를 기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박팽년선생유허비(朴彭年先生遺墟碑)」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팽년 [朴彭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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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成三問]




성삼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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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순절한 성삼문의 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으로서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이칭별칭
자 근보(謹甫), 호 매죽헌(梅竹軒), 시호 충문(忠文)


유형
인물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418년(태종 18) ~ 1456년(세조 2)


성격
문신


출신지
홍성(洪城)


성별



본관
창녕(昌寧)


관련사건
단종복위운동


저서(작품)
매죽헌집


대표관직(경력)
홍문관수찬, 예조참의, 예방승지


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1418(태종 18)∼1456(세조 2).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성삼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성삼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후 아버지 성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慥)·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성삼문은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 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성삼문은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성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성삼빙(成三聘)·성삼고(成三顧)·성삼성(成三省)과 아들 성맹첨(成孟瞻)·성맹년(成孟年)·성맹종(成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형을 당한 뒤 성삼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성삼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節臣: 절개를 지킨 신하)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상훈과 추모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莊陵: 단종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洪州成先生遺墟碑)」와 「연산성선생유허비(連山成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삼문 [成三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물품 현상태


책상태 : 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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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수 : 1책

책크기 : 가로 21cm, 세로 33cm,


* 물품 특징

rn

* 물품 현상태

책상태 : 미품

* 물품 크기/무게/치수

책본문 : 200쪽 정도
책형태 : 한지 위에 목판 인쇄
책크기 : 가로 21cm, 세로 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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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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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발행 ( 현재서점판매가 : 원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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